- 저자
- 천선란
- 출판
- 현대문학
- 출판일
- 2022.10.25
평소 현대문학 핀시리즈를 좋아해서 자주 읽는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SF 문학으로 유명한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이다. 현대문학 핀시리즈는 소설뿐만 아니라 시(詩)도 출판하고 있다.
천선란 작가 역시 SF 문학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 <랑과 나의 사막> 역시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인간을 그리워하는 로봇 '고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랑'이라는 인간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사람의 감정을 언제나 '모방'한다고 생각한 고고는 감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랑을 찾으러 떠나게 된다.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조가 떠난 뒤 랑이 방패처럼 말했다.
- 본문 중에서
또 멋대로 랑의 영상을 본다. 또 과거를 재생한다. 3년 전 랑이 떨어트린 망치에 맞은 이후로 기억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오류.
지카에게 말하면 고쳐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류를 유지하고 싶다. 불현듯 재생되는 것은 마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리움 같아서 나는 그것을 흉내내고 싶다. 감정을 훔칠 수 없으니 베끼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고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없는 로봇 고고. 자신을 처음 발견했던 인간인 랑이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하자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랑과 함께 살았던 지카에게 우연히 들은 '과거로 가는 땅'에 가고싶어 하는 고고는 사막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고 사진에는 의도가 들어가지. 감정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의도는 해석하게 만들어.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정지해 있는 그림을 보고도 파도가 친다고, 바람이 분다고, 여인들이 웃는다고 생각하지.
- 본문 중에서
내가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감정이 아닌 정서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며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보편적인 감정은 응당 그렇게 느끼길 바라는 인간의 바람으로, 교육적인 의도로 강요되지만 실제 인간의 감정은 스펙트럼이 넓고 그 정서는 오롯이 당사자만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고고)
어림잡아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아. 인간은 대체로 많은 일들을 어림잡아 생각해서 망친다.
- 본문 중에서(고고)
사막을 건너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 정도를 아는 자에게만이 사막을 건널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걸 고고가 가져.'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해. 그래야 너한테 준 걸 내가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오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랑은 내게 내민 조개껍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랑이 준 조개껍질을 받아 다시 랑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그럼 랑이 이걸 가져야지. 나도 이게 마음에 들거든.'
-본문 중에서(랑&고고)
고고는 사막을 홀로 횡단하며 버진을 구해주고 버진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인간이다.
"인간이 왜 사막을 무서워 하는 줄 아나?"
(중략)
"조용해서야."
물도, 식량도 아니라 침묵이 인간을 두렵게 하는 거라면 이 사막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소리가 무엇인지 추측한다.
가령 랑의 목소리 같은 것.
고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 같은 것.
- 본문 중에서(고고 & 버진)
인간은 스스로가 다정한 존재이길 바라면서도 끝내 그 몫을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고 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네. 애초에 그런 마음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 본문 중에서(버진)
고고는 버진과 헤어져 가다가 트랙터를 다루는 로봇인 알아이아이를 만난다. 알아이아이는 자신을 만들어준 인간 카일을 기다린다. 카일은 고고가 사막을 횡단하며 묻어 준 시신이다.
"과거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갈 수만 있다면."
"왜 가십니까?"
"머물던 곳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어서 그곳으로 간다."
-본문 중에서(고고 & 알아이아이)
사람이 과거에 머물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현재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그리움의 대상이 과거에 있을 때 우리는 과거에 머무르려고 한다.
고고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살리이다. 살리는 엄밀히 말하면 외계인이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 살리
살리는 고고의 감정이 고고가 모방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고고의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고고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랑의 영상, 살리는 그것이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고고는 자신이 더이상 감정을 모방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의 감정이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고고는 다시 살리를 떠나 랑을 찾아 떠난다. 랑이 있을 땅으로 떠난다.
소감
로봇이 감정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와 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감정에 휘둘려 사는 인간만큼 비효율적인 동물도 없는데.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로봇마저 감정이 있다면 일을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감정이 인간과 동물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멀리 두고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 오히려 이런 정서를 치유하는 로봇이 고안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고처럼 그리움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는 로봇이 생길지도 모른다.
☞ 천선란 작가의 추천착
- 저자
- 천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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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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