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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 현대문학 핀시리즈 43

 
랑과 나의 사막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마흔세 번째 소설선, 천선란의 『랑과 나의 사막』이 출간되었다. 2022년 『현대문학』 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이번 작품은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졌다가 기능이 정지된 채 사막에 파묻혀 있던 로봇 ‘고고’에게 생명을 준 인간 ‘랑’이 사망하자, 랑이 가고 싶어 했던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고고가 홀로 길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2019년, ‘국내 SF 아포칼립스의 정석’이란 극찬을 들은 『무너진 다리』로 혜성처럼 등장한 천선란은 뒤이어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잠기고 싶은 소설”(김초엽) 여덟 편을 담은 『어떤 물질의 사랑』을 발표하며 빠르게 자신의 문학세계를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장르소설 중 손꼽히는 판매고를 기록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천 개의 파랑』은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유명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김보영) “더 이상 ‘좋은 한국 SF의 가능성’이란 얘기는 듣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김창규)라는 찬사까지 이끌어내며 가능성이 아닌, 완성형의 상태로 우리에게 도달한 ‘준비된 작가’라는 평을 얻게 했다. 천선란의 활발한 횡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나인』 『노랜드』에까지 계속 됐고, 이제는 더 이상 장르소설의 자장 안에서만 논해지는 것을 거부한 채, 자신의 문학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며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전무후무한 작가가 되었다. 흔히들 SF 소설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과 외계인이 등장하고, 우주 세계 어딘가가 배경이고, 다루는 세계관마저 낯설어 순문학 독자들이 읽어내기에는 장벽이 있다고들 말한다. 천선란의 소설 역시 무수한 로봇이 등장하고, 외계인이 등장하고, 배경 또한 낯설지만 기존의 선입견을 넘어선 결과를 내고 있다. 이상하리만치 그의 소설은 잘 읽히고, 게다 뭉클하다.
저자
천선란
출판
현대문학
출판일
2022.10.25

 

평소 현대문학 핀시리즈를 좋아해서 자주 읽는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SF 문학으로 유명한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이다. 현대문학 핀시리즈는 소설뿐만 아니라 시(詩)도 출판하고 있다.
 
천선란 작가 역시 SF 문학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 <랑과 나의 사막> 역시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인간을 그리워하는 로봇 '고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랑'이라는 인간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사람의 감정을 언제나 '모방'한다고 생각한 고고는 감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랑을 찾으러 떠나게 된다.

 

랑과 나의 사막 표지

감정에는 효율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조가 떠난 뒤 랑이 방패처럼 말했다.
- 본문 중에서

 

또 멋대로 랑의 영상을 본다. 또 과거를 재생한다. 3년 전 랑이 떨어트린 망치에 맞은 이후로 기억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오류.

지카에게 말하면 고쳐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류를 유지하고 싶다. 불현듯 재생되는 것은 마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리움 같아서 나는 그것을 흉내내고 싶다. 감정을 훔칠 수 없으니 베끼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고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없는 로봇 고고. 자신을 처음 발견했던 인간인 랑이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하자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랑과 함께 살았던 지카에게 우연히 들은 '과거로 가는 땅'에 가고싶어 하는 고고는 사막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그림에는 감정이 들어가고 사진에는 의도가 들어가지. 감정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의도는 해석하게 만들어.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정지해 있는 그림을 보고도 파도가 친다고, 바람이 분다고, 여인들이 웃는다고 생각하지.
- 본문 중에서

내가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감정이 아닌 정서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며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보편적인 감정은 응당 그렇게 느끼길 바라는 인간의 바람으로, 교육적인 의도로 강요되지만 실제 인간의 감정은 스펙트럼이 넓고 그 정서는 오롯이 당사자만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고고)
어림잡아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아. 인간은 대체로 많은 일들을 어림잡아 생각해서 망친다.
- 본문 중에서(고고)

 

 

사막을 건너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 정도를 아는 자에게만이 사막을 건널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걸 고고가 가져.'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해. 그래야 너한테 준 걸 내가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오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랑은 내게 내민 조개껍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랑이 준 조개껍질을 받아 다시 랑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그럼 랑이 이걸 가져야지. 나도 이게 마음에 들거든.'
-본문 중에서(랑&고고)

 

고고는 사막을 홀로 횡단하며 버진을 구해주고 버진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인간이다.

 

"인간이 왜 사막을 무서워 하는 줄 아나?"
(중략)
"조용해서야."

물도, 식량도 아니라 침묵이 인간을 두렵게 하는 거라면 이 사막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소리가 무엇인지 추측한다.
가령 랑의 목소리 같은 것.

고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 같은 것.
- 본문 중에서(고고 & 버진)
인간은 스스로가 다정한 존재이길 바라면서도 끝내 그 몫을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고 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네. 애초에 그런 마음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 본문 중에서(버진)

 

고고는 버진과 헤어져 가다가 트랙터를 다루는 로봇인 알아이아이를 만난다. 알아이아이는 자신을 만들어준 인간 카일을 기다린다. 카일은 고고가 사막을 횡단하며 묻어 준 시신이다.

 

"과거로 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갈 수만 있다면."
"왜 가십니까?"
"머물던 곳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어서 그곳으로 간다."
-본문 중에서(고고 & 알아이아이)

 

사람이 과거에 머물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현재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 그리움의 대상이 과거에 있을 때 우리는 과거에 머무르려고 한다.

 

고고가 마지막으로 만난 이는 살리이다. 살리는 엄밀히 말하면 외계인이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 살리

 

살리는 고고의 감정이 고고가 모방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고고의 것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고고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랑의 영상, 살리는 그것이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고고는 자신이 더이상 감정을 모방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의 감정이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고고는 다시 살리를 떠나 랑을 찾아 떠난다. 랑이 있을 땅으로 떠난다.

 


소감

로봇이 감정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와 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감정에 휘둘려 사는 인간만큼 비효율적인 동물도 없는데.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로봇마저 감정이 있다면 일을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감정이 인간과 동물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멀리 두고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 오히려 이런 정서를 치유하는 로봇이 고안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고처럼 그리움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는 로봇이 생길지도 모른다.

 


☞ 천선란 작가의 추천착

 
나인
재미와 감동을 전 세대에 전하는 소설Y 시리즈가 새로운 K-영어덜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국형 영어덜트 소설의 지평을 넓히는 이번 시리즈의 두 번째 권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천선란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나인』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평범한 고등학생 ‘나인’이 어느 날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숲의 속삭임을 따라 우연히 2년 전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나인은 친구 미래, 현재, 승택과 함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는 나인과 친구들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와 참신한 상상력, 속도감 넘치는 서스펜스를 모두 갖춘 이 특별한 소설은 천선란 작가의 찬란한 성취로 기억될 작품이다. 어른들의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찾는 나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용기라는 풀잎이 쑥 자라나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
천선란
출판
창비
출판일
2021.11.05
 
천 개의 파랑
SF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예견하는 장르라면, 『천 개의 파랑』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희미해지는 존재들을 올곧게 응시하는 소설이다. 발달한 기술이 배제하고 지나쳐버리는 이들, 엉망진창인 자본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이들을 천선란은 다정함과 우아함으로 엮은 문장의 그물로 가볍게 건져 올린다. 그의 소설은 희미해진 이들에게 선명한 색을 덧입히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락사당할 위기에 처한 경주마 ‘투데이’, 하반신이 부서진 채로 폐기를 앞둔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는 소녀 ‘은혜’, 아득한 미래 앞에서 방황하는 ‘연재’, 동반자를 잃고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끝없는 애도를 반복하는 ‘보경’, 『천 개의 파랑』은 이렇듯 상처 입고 약한 이들의 서사를,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따뜻한 파랑波浪처럼 아우른다.
저자
천선란
출판
허블
출판일
2020.08.19
 
어떤 물질의 사랑
《천 개의 파랑》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천선란 작가의 첫 소설집『어떤 물질의 사랑』. 치매 어머니가 기억하는 유일한 단어인 ‘작가’, 그 기억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몇 년간 매일 4시간씩 어머니의 병실을 지키며 쓴 환상적이고도 우아한 소설들이다. 우주비행사가 된 딸의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그린 〈사막으로〉에서 시작해, 지구의 바다 생물 멸종을 극복하기 위해 토성의 얼음위성 엔셀라두스로 날아간 탐험대가 만나게 된 외계생명과의 극적인 조우를 다룬 〈레시〉, 한때 과거를 함께 했으나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생겨버린 2인의 얘기를 다룬 〈그림자놀이〉, 알에서 태어나 배꼽이 없는 소녀도 소년도 아닌 “어떤 외계인”의 ‘우주를 가로지른’ 사랑 이야기를 비롯 작가 천선란의 눈부신 등장을 알려줄 여덟 편을 수록했다.
저자
천선란
출판
아작
출판일
2020.07.20